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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심술을 부리더니, 잠시 조용해졌다. 일기예보에서 일요일 오늘(22일)만 해가 짱짱하고 다음 주 내내 흐린 날씨가 지속된다고 한다. 해가 중천이라 나가면 더위에 허덕일 테지만 분명 내일부터 이 화창함을 그리워할 게 뻔했다. 나가자.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내가 핸드폰을 불쑥 내민다. SNS에 올라온 사진이 묘하다. 분명 한국인데, 한국 같지 않은, 생경한데 또 어딘가 익숙한 풍광이다. 장소를 물어보니 해방촌 신흥시장이라고 한다. 아니, 해방촌에 시장이 있었나?

자주 가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버거 집이 있어 해방촌은 일 년에 한두 번은 방문하던 동네였다. 특히 해방촌 꼭대기와 남산 소월로가 만나는 지점은ELW교육
아는 사람은 아는 야경 맛집이다. 이곳에서 보는 서울 야경은 가히 최고라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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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촌 끝 소월로에서 본 서울 풍경. 야경은 정말 끝내준다.


ⓒ 윤한샘




시장이 어디 있는지 궁금해, 지도 앱을 찾아보니, 단골 버거 집 골목, 맞은편 방향에 있다. 분명 아는 ELW사이트
곳인데, 시장은 금시초문이라 호기심이 들었다. 그런데 언제 해방촌을 갔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마지막 해방촌 방문이 코로나 전이었다. 마침 잘 되었다. 오랜만에 해방촌에 가서 신흥시장을 보고 오자.

전쟁과 미군기지의 잔상이 남긴 동네
해방촌은 용산을 바라보는 남산 자락 밑 언덕에 자리한 동네다. 광복 메리츠화재 주식
이후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정착하며 시작됐다. 해방촌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피란민과 실향민이 판자촌과 블록 집을 지으며 부락을 형성했다. 공덕동, 아현동, 창신동이 그랬듯, 전쟁이 만든 가난의 상흔이 묻어있는 지역이었다.
60, 70년 대 거대한 미군기지는 이태원과 해방촌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수단이 됐다.놀이터 릴박스
이태원이 미군을 상대로 한 식당, 클럽, 상점들로 발전했다면 해방촌엔 작은 봉제공장이나 공업소 등이 들어섰다. 1953년 이 해방촌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인 장터가 신흥시장의 모태였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이태원은 내국인에게 이질적인 동네였다. 그때만 해도 길거리에 외국인이 지나가면 신기한 눈길을 주곤 했다. 흑인이나 유색 인종에 편견도 있었고 미국 문화에 위축감도 쉬이 느끼던 때였다. 나도 카투사에 근무하던 친구 덕에 90년대 중반이 돼서야 처음 이태원에 와보았던 기억이 난다.
2000년 대 중반이 돼서야 이태원과 경리단길 근방이 친숙하게 변했다. 배낭여행이나 어학연수 등을 다녀온 20, 30대가 소위 글로벌화 되며 문화적 거리감이 줄어 들었고 용산 기지가 평택으로 옮겨지면서 군인들이 사라진 영향도 있었다.
당시 이태원과 경리단길은 외국 문화를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힙한 동네였다. 이태원에 놀러 오는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소비자들이었다. 나 또한 이 시절에 이태원을 자주 놀러 갔다. 멜론이 통째로 들어간 빙수, 일반 마트에 없는 수입 맥주, 신상 농구화, 활짝 개방된 테라스에서 마시는 생맥주 등, 다른 곳보다 신문물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곳이 이태원이었다.
이태원이 쇼핑의 거리였다면 경리단길은 젊고 힙한 음식의 공간이었다. 마치 지금 성수동처럼 힙한 인테리어로 무장한 작은 식당과 펍이 가득했다. 경리단길 초입에서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펍이나 바 문화를 즐길 수 있었고 하얏트 호텔 방면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다이닝 같은 고급 레스토랑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결과, 2010년 초부터 이태원과 경리단길은 크래프트 맥주 성지로 명성을 떨쳤다. 벨기에와 미국에서 갓 수입된 맥주들과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데뷔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도 경리단길 초입에 자리한 '우리슈퍼'는 맥주 덕후들에게 진정한 맥주 성지였다. 평범한 슈퍼의 외관과 달리 서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수입맥주들을 구매할 수 있는 반전이 있었다. 육교 옆 골목에 있는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슈퍼스타였던 '더부스 펍'과 경리단길 중간에 있는 넓은 공간에 다양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남산 케미스트리'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문화 해방구, 해방촌

화려한 경리단길 바로 건너에 있는 해방촌은 관심을 받지 못했던 곳이었다. 해방촌의 급격한 경사 길은 경리단길과 다를 바 없었으나, 오래된 집들로 으슥한 골목과 불빛이 없어 어두침침한 환경으로 돌아다니기가 꺼려지던 주거지역이었다.










▲  용산2가동 주민센터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신흥시장으로 가는 골목이 나온다.


ⓒ 윤한샘




해방촌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아이러니하게 경리단길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한적해진 뒤였다. 젊은 창업가와 예술가들이 화려하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낮은 해방촌 구석구석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망원동이나 문래동처럼 서울의 낡은 구석이 드문드문 새로운 색깔을 입는 과정이 이곳에서도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해방촌을 처음 방문한 시기는 2017년, 아까 말한 버거 집을 가기 위해서였다.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누군가의 추천 때문이었다. 해방촌은 다양한 경로로 갈 수 있다. 우선, 녹사평역에서 미군기지 담장을 따라 경리단길 방향으로 걷다가 왼쪽 해방촌 방향으로 빠지는 경로가 있다. 만약 목적지가 해방촌 끄트머리에 있다면 마을버스 02번을 타는 게 낫다.
숙대입구역에서 용산고 방향으로 가는 경로도 있다. 이쪽으로 가면 진짜 해방촌 흔적을 볼 수 있다. 좁은 주택가 골목을 따라가야 하는데 계단이 가팔라 체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경로에는 치트키가 숨어있다. 올라가다 힘들면 뒤를 보면 된다. 서울의 엄청난 풍광이 모든 피로를 씻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대문에서 소월로를 따라 남산을 타는 경로가 있다. 이 경로는 해가 진 저녁에 가면 좋다. 청량한 남산과 환상적인 야경이 발걸음을 따라올 테니. 경사도 가파르지 않아 산책 코스로 추천한다.

내가 처음 해방촌을 갔을 때만 해도 카페나 레스토랑이 드문드문 있었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곳들이었는데, 주위 민가 때문에 늦게까지 영업하기도 힘들었다. 청년 예술가들의 공방이나 작업실 정도만 보였던, 아는 사람만 오는 동네가 해방촌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둘러보니, 상업 시설도 많아졌고 사람들도 북적거렸다.










▲  1953 신흥시장 입구


ⓒ 윤한샘




각양각색 문화 집성지가 된 신흥시장

02번 마을버스는 가파른 경사를 만날 때마다 끅끅 거렸다. 다행히 수동 변속기의 기어를 내리는 기사 할아버지의 손은 느리지만 노련했다. 버스는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언덕 끝에 도달한 버스는 힘이 풀린 듯 정류장까지 가볍게 굴러갔다.
버스에 내리니, 바뀐 주위 풍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확실히 예전보다 레스토랑이 많아졌다. 그런데 시장이 어디 있다는 거지? 한두 번 왔던 동네가 아닌데. 스마트 폰 지도 앱으로 찾아보니 용산2가동 주민센터 방향 길로 가다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했다.
몇 차례 헤매다 간신히 골목을 찾아 내려가니,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마법 같은 풍경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이 드러난 작은 건물 속에 각양각색의 식당과 카페 등이 빼곡했다. 옷가게와 소품 가게도 있었고 사주를 봐주는 점집도 한 구석에 보였다. 한 사람이 걸어갈 정도로 좁은 골목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는 젊은 남녀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와인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언뜻 보면 유럽이나 홍콩의 골목 같기도 했고, 드라마 세트장처럼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아기자기하고, 옛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요즘 것 같은. 입에서는 절로 힙하다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투명 지붕이었다. 자연광은 투과시키고 비를 막아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해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시장을 둘러보니 가난의 시절, 이 좁은 골목에서 이어지던 삶의 끈질김이 눈앞에 그려졌다. 내가 어렸을 때, 시장은 억척의 기운이 서려있던 곳이었다. 신흥(新興), 새롭게 일어난다는 이름처럼, 응축된 모진 삶이 정제되지 않은 채 뿜어져 나오던 그런 기운을 신흥시장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  예전 슈퍼를 레스토랑으로 바꿨다. 레프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 윤한샘




시장은 작았다. 한 바퀴 둘러보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ㄷ' 자 형태로 되어 있어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구조였다. 입구에 걸려있는 '1953 신흥시장' 표식에서 이곳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신흥시장은 해방촌 사람들의 생필품과 근처 봉제 공장들의 재료를 팔던 작은 장터였다.

2000년 대 들어 신흥시장이 쇠락의 길을 걸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시장의 기능은 자연스럽게 상실되었다. 좁고 어둡고 골목과 낡은 건물들로 사람들이 기피하는 장소로 전락하기도 했다.

신흥시장이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시기는 2015년부터였다. 서울시는 신흥시장을 도시재생활성화지역으로 지정하며 환경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서울챙'이라는 투명 지붕을 설치하고 하수도와 조명을 개선했다. 점포와 골목길을 개선하고 주택 127채를 리모델링하기도 했다.










▲  서울챙. 비와 눈을 막아주는 투명 지붕이 신의 한수


ⓒ 윤한샘




화룡점정은 임대료였다. 건물주와 6년 간 임대료를 동결하며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하고자 했다. 그리고 2021년 공식적으로 도시재생활성화 사업 종료를 알렸다. 지금 신흥시장은 작고 소소한 것들이 모여 다채로운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 됐다. 정체성을 해치지 않고 진정성을 가미한, 가장 훌륭한 도시재생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프로(Repro)에는 레트로(Retro) 맥주를
늦은 아침을 먹고 왔지만 허기가 졌다. 목도 말라 시원한 맥주도 간절했다. 해방촌닭이라는 레스토랑과 노가리 공장에 눈이 갔다. 해방촌닭에서 밥을 먹고 노가리 공장에서 간단히 맥주를 먹자.

해방촌닭은 요즘 보기 드문 전기구이 통닭을 팔고 있었다. 옛날에는 전기구이 통닭이 최고였는데. 우리나라 후라이드 치킨이 맛이 있긴 하지만, 헤비한 구석이 있어 나는 튀김옷이 얇은 시장통닭을 선호한다. 기름기 빠진 전기구이 통닭집이 집 근처에 있었다면 아마 단골이 되었을 것이다.










▲  해방촌닭의 전기구이와 맥주


ⓒ 윤한샘




가게는 작지만 젊은 직원들의 열정이 철철 넘쳤다. 허름한 공간이었지만 나를 비롯한 손님들은 그 키치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철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을 보니, 또 맥주를 안 시킬 수 없다. 짭짤하고 퍼석한 치킨이 목을 메울 때마다 청량한 맥주가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이보다 훌륭한 궁합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옆 가게 노가리 공장으로 서둘러 자리를 옮긴다. 다행히 딱 한 자리가 남아있다. 노가리 공장은 마치 처음부터 신흥시장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벽에는 펜으로 쓴 메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낙서들이 가득했다. 가장 오래된 낙서가 언제였는지 찾아보니 2020년이다.










▲  노가리 공장 메뉴와 낙서들


ⓒ 윤한샘




500cc 맥주 한 잔에 먹태와 구운 김, 아마 신흥시장에서 가장 저렴한 한 상이 아닐까. 하지만 세상 누구라도 만족하는 한 상이리라. 자리를 나서 골목을 걷는데, 테이블 위에 '신흥시장 라거'가 보였다. 아마 이곳을 위해 특별히 만든 맥주겠지. 그런데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살짝 인위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어떤 맥주가 신흥시장과 어색함이 없을까?

70~80년대 인기를 끌었던 크라운 맥주나 OB맥주를 판다면 어떨까? 신흥시장이 껍데기는 옛 것이지만 내용물은 요즘 것인 레프로(Reproduction)라면 맥주는 레트로(Retro)가 딱 맞을 듯했다. 신흥시장이나 신당동 중앙시장처럼 레프로 방식으로 도시재생이 된 지역에 과거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레트로 맥주를 판매하면 문화성과 상업성, 둘 다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맥주가 문화가 되어 도시재생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자리를 떴다. 해가 아직 많이 남아 한낮인 줄 알았는데, 5시였다. 하지여서 해가 길다. 피란민과 실향민의 터전에서 한국적인 멋의 중심이 된 신흥시장이 젠트리피케이션 고통 없이 길게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하지의 햇살처럼.










▲  먹태와 노가리. 맥주는 한 잔이면 충분하다.


ⓒ 윤한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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